삼국시대 백제 때는 거지산현, 고려 때는 장산현이라 하였으며, 산줄기가 오음산에서 아미산을 거쳐 대성산에 연결되고 여기서 비둘기산, 부학산, 중용마을 뒷산을 거쳐 활목마을 산까지 산줄기가 끊기는 데 없이 길게 연결되었다고하여 장산(長山)이라 칭한다.
면 소재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왁사지 간척으로 넓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해발 208m의 오음산이 굽어보고 있다. 이 곳은 본래 지도군 장산면의 지역으로 오음산 밑이 되므로 오음산, 오름, 오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북강리, 시미리, 대머리를 합하여 오음리라 해서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현재 오음·북강·앞면·발마구지·한샛골·뒷벌(後浦)은 오음1리, 시미·광포·동구섬·신촌·대머리(竹頭)는 오음2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1710년대 초 전주이씨 이란(李欄)이 의금부도사 재직시 모함에 의해서 유배 온 후 1년이 못 되어 해배(解配)되었으나 떠나지 않고 스스로 거문고와 책을 멀리 하면서 오음 산중에서 은거하여 전주이씨의 장산 입도조가 되었다. 그 후 김해김씨는 후포마을에서 이웃 마을인 이 곳으로 이주해 왔고, 창원황씨, 함양박씨는 하의도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함평노씨와 밀양손씨는 1900년대 초에 입향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음산이 다섯 봉우리이고 예로부터 노래를 잘 하는 명창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마을 앞 안산(案山)이 장구형으로 소리의 고장이라 하여 오음이라 하였다.
박씨가 가장 먼저 입향하였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고 1800년대 초 경주최씨 최병원(崔炳元)이 장택고씨와 안좌 소곡에서 이주하였고, 경주정씨 정기만(鄭奇萬)은 밀양박씨와 하의 대야도에서 풍족한 생활 터전을 찾아 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함평노씨, 김해김씨 등이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곳은 장산면의 관문으로 정기 여객선인 철부도선이 기항하고 있다.
마을이 장산도의 북쪽 첫머리에 있고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라 하여 처음에는 윤구지(尹衢地)라 하였으나 1930년 면의 관문인 선착장이 생기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되었고, 북쪽 어귀 바닷가에 위치한다 하여 북강(北江)이라 하였다.
김해김씨 김명철(金命哲)이 후포마을에서 1850년경 한샛골마을이 바다와 접하고 있어 어장을 개척하고 산기슭의 묵은 땅을 개간하기 위해 이주 정착하였고, 그 후 창원황씨가 오음마을에서, 전주이씨 이옥철(李玉喆)은 1966년 하의 장병도에서 이 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이주 정착하여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뒤쪽 오음산 골짜기에서 내려온 지세가 한새(황새) 형국과 같다 하여 한샛골이라 하였으며 크기에 따라 큰 한샛골과 작은 한샛골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김해김씨 김수명(金守命)이 암태도에서 살다가 1740년대 초 이 마을에 와서 지형을 살펴본 후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 하여 경주정씨와 혼인하여 정착하였고, 그 후 전주이씨, 창원황씨, 함양박씨 등이 오음마을과 인접해 있어 이 곳으로 이주하였고, 밀양손씨 손완섭(孫完燮)은 1900년경 안좌 내호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이주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의 터가 포구(浦口)이고 오음마을 뒤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후포(後浦) 또는 뒷벌이라 부른다. 1946년 방조제 축조 공사로 지금은 포구가 논과 염전으로 조성되어 있다.
밀양박씨 박광환(朴光煥)이 1750년경 하의면 유호리에서 시미마을로 처음 이거 정착하였고, 김해김씨는 1780년경 대리에서, 전주이씨는 오음, 진주강씨는 대머리에서 이주해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에 우물이 있어서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다 하여 시미(匙味)라 하였는데 한자어가 바뀌어 시미(是味)라 부르고 있다. 현재는 우물이 도로로 편입되어 멸실되었다.
진주강씨 강정삼(姜正三)이 1670년대 말 해남 우수영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물이 풍부한 이 곳에 이주 정착하였다. 그후 김해김씨는 1710년경 상태에서 이주하여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파평윤씨 윤세연은 1900년경 하의에서, 남평문씨는 장산 두동에서 1940년경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장산도에서 가장 먼저 선박(船舶)을 대었던 뱃머리이며 옛날 대나무가 많이 있었고 면의 서쪽 끝머리여서 죽두(竹頭) 또는 대머리라 칭한다.
면 소재지인 도창리에서 남쪽으로 연접해 있는 마을로 남쪽에는 대성산이 우뚝 솟아 있다. 본래 지도군 장산면의 지역으로서 큰 마을이 되므로 큰몰, 큰말, 큰동네 또는 대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창촌리, 신촌리, 대세리를 통합하여 대리라 해서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이 곳은 선사 시대의 유적인 지석묘가 있고, 장산현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있을 뿐이다. 현재 대리, 창몰(倉村), 새트몰(新村), 대신터는 대리1리 목에(項里), 삼방은 대리2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의령남씨가 나주에서 이주하여 가장 먼저 입향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630년경 김해김씨 김수매(金守?)가 해남 우수영에서 살다가 이 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그 후 밀양박씨 박정환(朴正煥)은 1703년경 해제 발산에서, 경주정씨 정덕빈(鄭德彬)은 1710년경 해남 송지에서 난을 피하여 이주하였다. 인동장씨 장인걸(張仁傑)은 1770년경 함평, 해남을 거쳐 진도 가사도에서 대리로 이주하였다. 장산초등학교, 보건지소, 한전출장소가 자리하고 있다.
면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마을이 크다 해서 큰몰, 큰말, 큰동네라 하여 대리라 하였다.
김해김씨 김원석(金元碩)이 대리에서 살다가 1640년경 이 마을로 이주해 왔으며 밀양박씨, 평산신씨, 해주오씨, 전주최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장산현의 곳집이 있었다 하여 창촌(倉村), 창몰이라 하였다.
해주최씨 최경보(崔敬輔)가 1788년 장산 하용에서 살다가 이주하였고 경주정씨는 1820년경 팔금도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이주하였다. 또한 창원황씨 황두만(黃斗萬)은 1860년경 장산 어도에서, 의령남씨 남선명(南先明)은 1870년경 대리에서, 김해김씨는 1880년경 평사도에서, 장택고씨는 1890년경 도초도에서, 남평문씨 문도빈(文道彬)은 1924년 안좌 자라도에서 각각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인 큰산(대성산이라고도 함)은 산림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으며 8부능선 부근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고 이곳에 최초로 10여 가구가 정착하여 살다가 1930년대 중반부터 큰산 아래쪽으로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큰산의 8부 능선에서부터 시작된 실계천은 수량이 풍부하여 아무리 극심한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고 1년 내내 시냇물이 마을을 굽이돌아 2km여에 걸쳐 흐름에 따라 「실계천의 발원지 또는 실계천의 모태」라는 뜻에서 “모계(母溪)”라 지명되었다.
※ 참고자료 및 사례
가. 현재는 경지정리로 인하여 지적도에서 “구거”가 사라졌지만, 옛 지적도(1997년 이전)를 살펴보면 큰산(대성산) 8부 능선에서부터 형성된 실계천은 현재 마을 앞을 거쳐 삼배 앞까지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
나. 또한, 1967~1969까지 3년간의 극심한 한해 때는 장산면의 많은 주민이 큰산(대성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길어다 생활용수로 사용했으며, 마을 앞 논은 가뭄을 겪지 않았음.
임동장씨 장치규(張致奎)의 아들 셋 중 막내아들인 장진위(張鎭僞)가 다수 통머리에서 1900년경 이주 정착하였다. 그 후 장택고씨, 김해김씨, 밀양박씨가 이주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 제방이 두 차례 붕괴되고 세 번째에 완공되었다 하여 삼방(三防) 또는 삼배라 하였다.
면소재지로서 마을의 북쪽에는 토미산과 동으로는 부학산(浮鶴山)이, 서쪽으로는 아미산이 있다. 본래 지도군 장산면의 지역으로서 창고가 있어 도창(都倉)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사창리, 두동리, 오음리, 일부 지역을 합하여 도창리라 해서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장산면 소재지로서 면사무소, 중학교, 경찰 파출소, 농업협동조합, 우체국, 예비군 면대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지석묘와 백제석실분 등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노거수림(老巨樹林)이 도창마을의 뒤편 국도변에 조성되어 있다. 현재 도창마을은 도창1리, 사창?두동은 도창2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수원백씨가 1560년경에 먼저 들어왔고 그 후 김씨가 입향하였다 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하동정씨 정만적(鄭晩迪)이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나주에서 숙모를 따라 압해 매화도에 옮겨 살다가 1690년경 도창마을로 이주하였다. 밀양박씨 박돌산(朴乭山)은 1695년경 해남 우수영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이주하였고 그후 김해김씨는 공수에서, 해주최씨는 하용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세금을 미곡으로 징수하여 저장했던 창고가 있었다 하여 도창이라 하였다. 도창(都倉)이라 추정되기도 하나 현재는 도창(道昌)이라 한다.
경주정씨 정우현(鄭宇賢)의 아들 4형제 중 막내아들인 정지성(鄭智誠)이 1690년대에 공수에서 사창마을로 이주 정착하였고 김해김씨 김중근(金重根)은 1900년경 사근마을에서 이주하였다. 진주강씨 강도삼(姜道三)은 죽두마을에서 이주하였으며 이후 완산이씨(完山李氏), 경주최씨(慶州崔氏), 해주최씨(海州崔氏), 하동정씨(河東鄭氏)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1948년 면사무소가 창촌 마을에서 이전하였다.
조세(租稅)를 운반하던 배가 옛날 이 곳에서 환곡(還穀)을 실었으며 또한 환곡을 보관하던 곳집이 있는 곳이라 하여 사창(社倉), 또는 건너몰이라 하였다.
1630년경 해남 우수영에서 대리로 이거한 김수매(金守?)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연고로 김성화(金聲華) 김여화(金汝華)형제가 1860년대 초 우수영에서 두동으로 이주했다. 1790년경 나주임씨는 팽진에서, 하동정씨는 도창에서 1900년경에 정기범(鄭基範)이, 밀양박씨 박생봉(朴生奉)은 1920년경에 오음리 시미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 향교터인 양원동(養院洞)에 장산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 아미산(배미산 137m)이 말[斗]에다 곡식을 가득 담아 놓은 형국이라 하여 두동(斗洞), 또는 두말이라 하였다.
면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재지와의 거리는 4km이다. 남으로는 팽진리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염전이 있으며 왁사지 방조제 축조로 넓은 간척지와 접해 있는 마을로 고려시대 장산현(長山縣)의 공수전(公須田) 토지가 있어 공수촌, 공수라 하였고, 면소재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면(東面)이라고도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초리, 중산리, 비소리를 통합하여 공수리라 해서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에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무형문화재인 장산들노래가 1981년 제12회 남도문화제에 최우수상, 1982년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하중(夏中)밭매기노래는 1987년 제16회 남도문화제에서 민요 부분 우수상을 수상하여 농요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현재 공수?마초는 공수1리, 중산·비소는 공수2리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경주정씨 정학령(鄭鶴齡)이 양주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자손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나주목 장산으로 이거(移居)토록 하여 아들 정산영(鄭山永)이 1570년대 초 공수마을로 와서 정착하였다. 그 후 김해김씨 김시일(金時鎰)이 1795년경 상용마을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이주하였고, 전주최씨는 비소에서, 제주양씨는 하의도에서 이주하였다. 이후 밀양박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고려시대 장산현(長山縣)의 공수전(公須田) 토지가 있어 공수촌, 공수라 하였고, 면소재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면(東面)이라고도 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뒷산의 모양이 양손을 두르고 있는 형국이어서 공수(拱手)라 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공수(公需)라 한다.
전주최씨 최반(崔潘)이 중용마을에서 1800년대 초 이 마을에 와서 보고 마을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으로 안주할 곳이라 하여 정착하였다. 김해김씨는 1810년경 안좌에서, 전주이씨는 1830년경 도초에서, 경주정씨 정민규(鄭敏圭)는 1930년경 공수에서 각각 이주하였다. 그 후 수원백씨, 남평문씨, 한양조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에 있는 우물이 아주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는 일이 없고 물맛이 좋아 1979년에 간이 급수 시설을 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앞산이 말[馬] 모양으로 아마식초(餓馬食草) 즉 배고픈 말이 풀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마초(馬草) 또는 마추머리라 하였다.
경주정씨 정현율(鄭鉉律)이 중산 삼골의 문중 전답을 관리하기 위해 1825년 공수마을에서 이거 정착하였다. 경주김씨 김두헌(金斗憲)은 1860년경 하의 피섬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찾아 이주하였고, 한양조씨는 1920년경 비소에서, 김해김씨 김영건(金榮健)도 비소마을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이후 남평문씨, 인동장씨, 하동정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길게 형성되어 있는 마을 가운데에 산이 있어서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전주최씨 최계충(崔啓忠)이 1680년대 말 해남 송지면에서 피난하여 정착하였으며, 한양조씨 조종성(趙鍾聲)의 아들 3형제가 해남 송지에서 살다가 가혹한 세금 부담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맏아들 조일원(趙一元)은 완도로, 조덕원(趙德元) 조석원(趙石元) 형제는 1840년경 이 마을로 정착하였다. 이후 경주정씨 정경순(鄭京巡)은 1880년경 도창마을에서, 김해김씨는 평사도에서 이주하였고, 남평문씨, 남양제갈씨, 장수황씨, 창원황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비소 방조제(1951년)와 왁사지 방조제(1969년)의 간척 사업으로 논과 염전 240ha가 조성되어 농토가 넓은 지역이다.
마을 뒷산의 지형이 비소모금(飛巢暮禽), 즉 저녁에 새가 집으로 날아 들어오는 새집 형국이라 비소(飛巢)라 부른다는 설과, 부유한 마을이 된다 하여 한자어를 비소(肥巢)라 한다는 설이 있다. 비소는 안[內]비소와 밖[外]비소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면소재지에서 동남쪽 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곳은 북으로는 공수리, 서쪽으로는 다수리와 접해 있다. 사근 남쪽 1km 떨어진 곳에 백야도와 굴배섬이 있다. 본래 지도군 장산면의 지역으로서 팽나루 옆이 되므로 팽나루, 팽나리, 또는 팽진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호피리, 궁항리, 상용리, 중용리, 하용리, 사근리, 백야도, 지역을 합하여 팽진리라 해서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이 곳은 남동쪽의 중심권으로 축강 선착장이 있어 철부도선이 1일 3회 왕복 운항하고 있다.
현재 팽진, 궁항, 중용, 신촌, 두루메, 호피는 팽진 1리, 상용, 하용, 사근, 백야도는 팽진2리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1962년 9월 1일 장산동초등학교가 개교하였으나, 이농현상과 출산율 저하로 1998년 3월 1일 장산초등학교 동분교장으로 격하되었고 2008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장수황씨 황윤주(黃崙周)가 오음마을에서 1760년경 이 마을을 보고 안주할 곳이라하여 정착하였다. 밀양박씨는 1800년경 해남에서, 전주최씨 최광숙(崔光淑)은 1830년경 비소에서 전답을 장만하여 이주하였다. 그 후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 마을 앞에 팽나무군이 있었고 이 곳에 나루터가 있어 팽진(彭津), 팽나리, 팽나루라 부르고 있다.
1760년대 초 장수황씨 황철현(黃綴顯)이 백야도에서 이 곳에 이주하여 전답을 개간 정착하였고, 전주최씨 최우홍(崔禹洪)이 비소에서 마진도를 거쳐 1800년경 이주하였다. 그 후 김해김씨는 상용에서 전주이씨는 팽진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문가(文家)터라 불려 오던 곳에 1962년 9월 1일 장산동초등학교가 개교하였다.
마을 뒷산 지형이 용의 형국이고 마을의 터가 가운데에 형성되었다하여 중용(中龍)이라 하였다.
밀양박씨 박경신(朴京信)이 1860년경 장산 호피마을에서 이주 정착하였고, 김해김씨는 1900년경 해남 우수영과 상용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전주최씨 최팔만(崔八萬)은 대리에서 1940년경에, 이후 전주이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밀양박씨 박경신(朴京信)이 1860년경 장산 호피마을에서 이주 정착하였고, 김해김씨는 1900년경 해남 우수영과 상용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전주최씨 최팔만(崔八萬)은 대리에서 1940년경에, 이후 전주이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도창 두동마을에서 김응규(金應奎)가 1810년대 초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자 이주하였고, 하동정씨 정관수(鄭寬秀)는 1932년 도창에서 살다가 이 곳에 농토를 구입하여 정착하였다. 그 후 광산김씨, 박씨, 이씨, 황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터가 활의 생김새와 같다 하여 궁항(弓項), 또는 활목이라 하였다.
해남의 호랑이가 장산으로 건너왔는데 산신령이 나타나 호랑이를 잡아 껍질을 벗겨 주저앉혔다고 해서 호피, 또는 범주겐이라 하였다.
1725년대 말 김해김씨 김호장(金灝章)이 해남 우수영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하동정씨는 도창에서, 평산신씨는 하태에서, 제주양씨는 안좌에서 이주 정착하였다.
마을 뒷산의 지형이 용머리처럼 생겼고 마을의 터가 위쪽에 형성되어 있다하여 상용 또는 용호동이라 하였다.
김해김씨 김만성(金萬成)이 1693년 우수영에서 별세하자 부인 파평윤씨가 아들 형제를 데리고 공수마을에 이거하여 살다가 1700년대 초 김덕창(金德昌), 김덕순(金德順)형제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남평문씨는 1880년에 이주하였고, 하동정씨 정선채(鄭仙采)는 도창에서, 장수황씨는 백야도에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이거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1900년경에는 장산면의 관문으로서 정기 여객석이 해남 화원, 진도 소포, 조도, 신의면 상하태와 연결되었고 1930년대에는 목화 수매 보관 창고가 있어 인근 도서가 이 곳에서 목화 수매를 하여 아주 번창하였던 곳이다.
1962년 팽진 축강선착장이 시설되면서 여객선 선착장이 폐쇄되었다.
마을 동편 나지막한 산의 생김새가 낚시대형이고 마을 앞바다에 있는 홀아비여가 벅수[찌]의 형태이며, 고깃배와 소금배를 대던 뱃머리, 또는 남쪽 끝머리라 하여 벅수머리, 또는 마을 앞에 벅수[장승]가 있었다 하여 벅수머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후 마을 앞 바닷가의 모래가 가깝다 하여 사근(沙近)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80년대 말 해주최씨 최경천(崔擎天)이 충청도 보령에서 난을 피하여 이 마을로 들어와 둘러보고 안주할 곳이라 하여 정착하였으며, 몇 년 후 최경천이 충청도 보령으로 다시 간 뒤 돌아오지 않아 부인 김해김씨와 아들 최종원(崔宗元)이 터전을 잡고 살았다. 김해김씨는 1850년 공수에서, 경주정씨 정관길(鄭官吉)은 1940년경 중산마을에서, 전주이씨는 해남화원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뒷산의 생김새가 용의 꼬리 모양이고 마을의 터가 아래쪽에 있다 하여 하용이라 하였다.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5㎞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 곳은 북으로 대성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바다에 연해 있다. 동쪽으로는 염전이 있으며 막금도를 포함하고 있다. 본래 지도군 장산면의 지역으로서 대성산 밑이 되므로 다수동, 다수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어도리, 월산리, 통두리, 막금도, 상용리 일부 지역을 통합해 다수리라 하여 무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1월 1일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대성산에는 산성이 남아 있고 완도와 진도를 연결했던 봉화터와 장산목장의 유적이 있는 곳이다. 현재 다수동은 다수1리, 어도[앤두]·성주골·막금은 다수2리, 통두·월산·신촌은 다수3리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이다.
1670년대 초 김해김씨 김원성(金元聲)이 대리에서 이 곳이 물이 많고 생활 터전이 좋아 이주 정착하였고, 경주정씨 1780년경 해남에서, 밀양박씨는 1800년경 진도에서 이주하였다. 영양천씨는 1880년경 안좌에서 이주하여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뒤 대성산의 숲이 울창하고 사철 물이 많이 흐른다 하여 다수동(多水洞), 다수라 하였다.
양천허씨 허심이 1770년 다수에서 도초 오류리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아들 허형이 1810년경 고향을 찾아 다시 장산 어도마을로 이주하였다. 김해김씨 김도태(金道泰)는 1870년경 성주골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남평문씨 문태길(文台吉)은 1930년경 상용에서, 평산신씨는 대리에서, 경주최씨는 상태에서 이주하였으며 그후 전주이씨, 금성오씨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상태(현 신의면)와 이 마을에 나룻배가 건너다니던 나루터라 하여 어도(於渡) 또는 앤두라 하였다.
1860년경 죽두에서 살던 김해김씨 김석민(金錫敏)이 이주하였다. 전주이씨는 하태에서, 인동장씨는 대리에서 상태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이 곳으로 와서 정착하였다. 그 후 경주정씨는 대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대성산에는 성(城)이 있어 옛날 성을 관리하는 성주(城主)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성주골 또는 성자동이라 한다.
섬에 금줄기가 있다 해서 막금이라 하였다고 하나, 금맥은 찾을 수 없고 현재는 막금(莫今)으로 표기 되어 부르고 있다.
1857년 인동장씨 장치규(張致奎)가 대리에서 살다가 남쪽 고개 너머에 위치한 통두의 땅을 개간하여 정착하였고, 김해김씨 김경선(金京先)은 1890년 말엽 새로운 곳을 찾아 다수마을에서 이주하였다. 장수황씨 황원주(黃源周)는 1900년경 백야에서 이주하였으며, 그 후 천안전씨, 진주강씨 등이 입향하여 마을을 형성하엿다.
마을의 생김새가 통(桶)과 같이 생겼다 하여 통두(桶頭) 또는 통머리라 하였다.
1903년경 밀양박씨 박옥천(朴玉千)이 상용에서 살다가 월산의 달메 들에 전답을 매입하면서 이주 정착하였다. 이후 인동장씨는 통두마을에서, 김해김씨는 비소마을에서, 경주정씨는 중산마을에서 이주하여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1903년경 밀양박씨 박옥천(朴玉千)이 상용에서 살다가 월산의 달메 들에 전답을 매입하면서 이주 정착하였다. 이후 인동장씨는 통두마을에서, 김해김씨는 비소마을에서, 경주정씨는 중산마을에서 이주하여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신촌(新村)이라 하였다.
면소재지로부터 동남쪽 8.2㎞ 지점에 위치한 섬으로 동으로는 바다 건너 해남 화원면과 접해 있다. 또한 남쪽 바다 5㎞지점에 율도가 위치해 있다. 마진, 율도 자연마을로 구성된 이 곳은 본래 진도군 조도면 마진도리[마진(馬津), 율도(栗島), 저도(楮島)]에 속하였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신안군 장산면에 속하였다. 1980년 8월 1일 대통령령 제13046호 시군 자치구의 관할 구역변경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마진도리 내 저도가 진도군 진도읍에 이속되었다.
현재 마진은 마진 1리, 율도는 마진 2리로 형성된 마을이다.
1635년 김해김씨 김형오(金亨五)가 나주에서 난을 피해 이 곳으로 와서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이 바다로 싸여 있어 어장이 풍부하고, 가까운 거리에 장산도가 있어 안주할 곳이라 하여 정착하였다. 전주최씨 최득오(崔得五)는 1780년경 장산 비소리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 정착하였다. 그 후 달성서씨, 이천서씨, 청주한씨 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진선착장에는 정기 철부도선은 1일 1회 왕복 운항하고 있으며 낙도연결선인 여객선은 1회 왕복운항하고 있다.
섬의 형태와 마을 뒷산의 바위가 말(馬) 모양이고 나루터가 있어 마진(馬津)이라 하였다.
1700년대 초 김해김씨 김석실(金錫實)이 해남 문내면에서 장산도를 향해 배를 타고 오던 중 이 섬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안주할 곳이라 하여 정착하였다. 밀양박씨는 1850년경 해남 문내면 학동에서, 경주김씨 김경민(金京敏)은 1860년경 해남 문내면에서 이곳에 처가가 있는 연고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의 주소득원은 주위의 섬에서 생산되는 자연산 미역 등 해초류이며, 마을 공동으로 해초류를 생산하고 있다.
섬의 형태가 밤(栗)모양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 섬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율도(栗島)또는 밤섬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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