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3도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하의삼도 농지탈환운동은 이땅의 농민들의 오랜 한이였던 내땅에 대한 염원이 담긴 항쟁으로서, 조선시기부터 일제시기까지 이 땅의 토지문제가 지니고 있었던 모순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농민운동이었다."
서남해 대부분의 섬들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부의 공도(空島)정책에 의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다가 임란 이후 평화로운 시대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때에야 토지의 개간이 시작되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법전에 따르면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서남해 연안에서 이미 개간되고 있던 많은 토지를 국왕으로부터 사패(賜牌)받아 그 소유권을 빼앗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은 선조(1552~1608)의 딸인 정명공주(홍씨가에 혼인)에 하사되면서 홍씨가문이 토지를 장악하고 도세를 거두어갔다. 이후에도 홍씨가의 탐욕은 계속되어 나중에 개간된 토지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이에 하의3도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하였지만 당대의 권세가를 꺽지 못하고 하의 3도의 땅은 모두 홍씨가의 땅이 되고 말았다. 한말에 이르러 그 토지는 홍씨가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가로, 그리고 홍씨가에 여러 브로커의 손을 거쳐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그리고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하의3도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들은 결코 홍씨가로부터 덕전(德田)까지 이어지는 지주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도세 혹은 도전의 납부를 거부하고, 각종 소송을 통하여, 그리고 농민조합 등을 통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결국 해방 후인 1950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으로 1956년에야 비로소 농지상환조치가 이루어졌다.
3백여년에 걸친 하의3도민의 이러한 저항운동은 한국사에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농민들의 항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운동은 일제시기 암태도 등 이웃 섬들에서 있었던 여러 소작쟁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즉 하의삼도 농지탈환운동은 이 땅의 농민들의 오랜 한이었던 내 땅에 대한 염원이 담긴 항쟁으로서, 조선시기부터 일제시기까지 이 땅의 토지문제가 지니고 있었던 모순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농민운동이었다.
사업개요('02 ~ '05)
- 위 치 :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하의로 115(대리 35-9)
- 사업규모 : 부지 17,699㎡(5,350평), 건물 612㎡(185평)
- 사 업 비 : 29억원
- 전시시설, 조경시설
- 도입부 : 종합안내센터, 정보검색실, 휴게실, 이미지 벽 등
- 토지항쟁기념실 (3구역) : 역사의 땅, 항쟁의 땅, 평화의 땅
- 농경문화실 : 하의3도 민속생활, 농업실태, 하의도 관광 등
- 야외 상징조형물 및 기념탑(1개소)
지금까지 추진상황 ('02 ~ '05. 12월)
- '02. 12월 건축공사 착공
- '03. 9월 조경공사 실시설계 용역 의뢰
- '04. 4월 전시관 건물 및 전시물 전시물 설치제작 완료
- '04. 12월 부대시설 및 조경시설 완료
- '05. 12월 진입도로 150m 개설 및 확포장
- '05. 12월 주차장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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