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연혁
-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지도면에 편입됨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함
형성
- 강화봉씨가 최초로 입도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그 내역은 알 수가 없다. 이후 1870년(고종 7)에 장택고씨가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마을에 진지가 있어 수군이 진을 치고 있다 하여 진리라 칭하였다.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
진리(鎭里) | 1500년경(연산군대) 1870년경(고종대) |
강화봉씨, 장택고씨 | 광주 | 진지(임자진)가 있다 하여 진리라 붙여진 지명이다. |
수도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됨
형성
- 1680년경(숙종6) 경주봉씨가 최초로 이주해오고 이후 광산김씨 김정희가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작은 섬인데도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하여 수도라 하였다.
수도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
수도(水島) | 1680년대(숙종대) | 경주봉씨 광산김씨(김정희) |
나주 | 작은 섬인데도 물이 풍부하고 깨끗하다 하여 수도라 하였다. |
도찬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괘길리를 합하여 도찬리라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됨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됨
형성
- 1500년경(연산군 6)에 장택고씨 고응삼이 최초로 괘길마을에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산세가 좋고 호수의 물이 맑다 하여 대청이라 부르다가 1900년경(광무 4)에 도찬이라 개칭하였다.
도찬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
도찬(道贊) | 1700년(숙종26) | 경주이씨(이경국) | 영광 | 산세가 좋고 호수의 물이 맑다 하여 대청(大靑)이라 부르다가 1900년도에 도찬으로 개칭하였다. |
전장(前場) | 1860년(철종11) | 밀양박씨(박와갈) | 지도(봉리) | 옛날에는 마을 앞 모래사장이 평평한 마당같다 하여 장불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전장포로 개칭하였다. |
괘길(掛吉) | 1500년경(연산군대) | 장택고씨(고응삼) 인동장씨 |
담양, 영광 | 임자면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뜬다 하여 괘일이라 칭하다가 일제강점기에 괘길로 개칭하였다. |
마방촌 (馬放村) |
1896년(건양1) | 김해김씨(김덕치) | 임자(도찬) | 1920년 일본인들이 말을 방목하였다 하여 마방촌이라 칭하였다. |
대기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삼막, 신명, 대기, 대흥, 구산, 교동, 회산, 장동마을을 합하여 대기리라 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형성
- 1400년대 후반에 김해김씨가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마을이 큰베틀 같다 하여 한틀이라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대기라 개칭하였다.
대기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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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막(三幕) | 1400년 후반경(정종대) | 김해김씨 | 영광 |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삼막동, 삼막골이라 칭하였다. |
신명(新明) | 1951년 | 전주이씨 | 6.25때 피난왔다가 정착하므로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
대기(大機) | 1600년경(선조33) | 김해김씨(김현회) | 나주 | 마을이 안산에서 본 형태가 큰베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대흥(大興) | 1600년경(선조대) | 김해김씨(김현희) | 나주 | 대기마을과 같은 마을이었는데 1974년 행정구역 조정 시 분리되었으며 크게 일어나라 하여 대흥이라 칭하였다. |
구산(鷗山) | 1650년경(효종대) | 의령남씨(남근) | 나주 | 본래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섬으로 마을 뒷산의 모습이 날으는 갈매기 같다 하여 갈뫼라 부르다가 이후 구산이라 개칭하였다. |
교동(校洞) | 1925년 | 황일식 | 영광 | 본래 구산마을에 속하다가 1919년에 임자초등학교, 1968년에 임자중학교가 설립되자 구산마을에서 분리되었으며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동이라 칭하였다. |
회산(回山) | 1700년경(숙종대) 1700년경(숙종대) 1700년경(숙종대) |
현풍곽씨, 김해김씨 탐진최씨 |
옛날에는 마을 앞이 바다로 되어있어 다른 곳으로 가려면 산이나 산골짜기를 넘어야 한다 해서 도림이라 부르다가 이후 회산으로 개칭하였다. | |
장동(長洞) | 1500년경(연산군대) | 이천서씨(서영휴) 진주정씨 |
마을이 길게 산 속으로 뻗혀 있다 하여 짱꿀이라 부르다가 1950년에 장동으로 개칭하였다. |
광산리
연혁
-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하우마을을 합하여 광산리라 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되었다.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형성
- 1560년 충주박씨 박길원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마을 둿산에 금이 묻혀있다 하여 금강산으로 부르다가 무안군에 속해 있을 때 광산으로 개칭하였다.
광산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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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光山) | 1560년대(명종대) | 충주박씨(박길원) | 충주, 무안 | 마을 둿산에 금이 묻혀 있다하여 최초에는 금강산이라 부르다가 이후 광산리로 개칭. |
하우(下牛) | 1611년(광해군3) | 양천허씨(허상옥) | 나주 | 마을의 모양이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우리라 붙여진 지명이다. |
재원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재원, 부남마을을 합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되었다.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형성
- 1500년대 후반 여양진씨 진유걸이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임자 본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하여 재원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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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원(在遠) | 1500년(연산군6) | 여양진씨(진유걸) | 함평 | 임자 본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라 하여 재원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
부남 | 광산김씨 | 섬이 서로 마주 보며 돕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부남군도라 붙여진 지명이다. |
삼두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필길, 삼두, 저동, 원상, 부동, 희용기미 마을을 합하여 삼두리라 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되었다.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되었다.
형성
- 1850년경 경주최씨가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예전에는 산머리라 부르다가 이후 마을 주변의 3개의 산봉우리가 머리형국이라 하여 삼두리라 개칭하였다.
삼두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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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길(筆吉) | 1850년대(철종대) | 진주강씨(강영관) | 영암 | 마을 우측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붓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삼두(三頭) | 1850년(철종1) | 경주최씨(최만신) | 영암 | 옛날에는 산머리라 부르다가 이후 마을의 뒷산, 앞산, 옆산의 봉우리가 3개의 머리형국이라 하여 삼두라 개칭하였다. |
저동(紵洞) | 1560년대(명종대) | 경주이씨(이덕년) | 경주 | 옛부터 모시가 많이 생산되어 모시동이라 부르다가 이후 저동으로 개칭하였다. |
원상 | 1880년(고종17) | 안동권씨(권오주) | 임자(부동) | 대둔산 밑의 마을로써 먼 산 밑에 마을이 있다 하여 원산이라 부르다가 이후 원상이라 개칭하였다. |
부동(富洞) | 1600년(선조33) | 밀양박씨(박중석) | 충청도(옥천) | 마을 모양이 솥같이 생겼다하여 부엌이라 부르다가 이후 물이 좋고 농토가 기름져 부자가 많이 산다 하여 부동이라 개칭하였다. |
희용기미 | 1880년(고종17) | 단양장씨(장귀동) | 임자(삼두) | 용의 꼬리가 희롱한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이흑암리
연혁
- 본래 지도군 임자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은동, 조삼, 화산을 합하여 이흑암리라 하여 무안군 임자면에 편입
-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신안군의 분군으로 신안군에 편입
형성
- 1566년 평산신씨 신영기 삼형제가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
- 이흑암리의 지명은 정유재란 당시 현재의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2구 흑암(黑岩)마을에 살던 탐진 최씨 일족들이 왜적의 나주 침공을 피해 배를 타고 인근의 문평천과 영산강을 따라 지금의 임자도로 피난을 와 터를 잡고 그 마을의 이름을 두번째 흑암리라는 의미의 이흑암리(二黑岩里)로 명명하여 지금에 이르렀음.
이흑암리 마을의 형성과 지명유래
마을명 | 형성년대 | 입도성씨(입도조) | 전 거주지 및 경유지 |
마을의 지명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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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흑암리 | 1566년(명종21) | 평산신씨(신영기) | 임자 | 이흑암리의 지명은 정유재란 당시 현재의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2구 흑암(黑岩)마을에 살던 탐진 최씨 일족들이 왜적의 나주 침공을 피해 배를 타고 인근의 문평천과 영산강을 따라 지금의 임자도로 피난을 와 터를 잡고 그 마을의 이름을 두번째 흑암리라는 의미의 이흑암리(二黑岩里)로 명명하여 지금에 이르렀음 |
조삼(鳥三) | 1680년(숙종6) | 진주강씨(강상호) | 영광 | 주변 세계의 산봉우리가 새의 형상이라 하여 새삼이라 부르다가 이후 한자어로 표기 시 조삼이라 개칭하였다. |
화산(花山) | 1600년대(선조대) | 진원박씨(박동원) | 장성 | 마을 뒷산이 연꽃 형상이라 하여 화산이라 붙여진 지명이다. |
대머리 | 1954년 | 남평문씨(문장호) | 이흑암리 | 마을의 모양이 2개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두머리라 부르다가 이후 대머리로 개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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